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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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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橋面 (주교면)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되었다.

舟橋里 (주교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배다리가 있으므로 「 배다리 」 또는 주교(舟橋)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궁언리(宮堰里) 거어리(巨於里)와 대동(臺洞) 명계리(鳴溪里) 산천리(山川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주교리(舟橋里)라 하였다.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되었다.

궁언안

「 듬붓굴 」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궁언내(宮堰內) 「 궁언안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이 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어느 한 해에 이곳 원님이 제방을 쌓아 두었는데 그 안쪽에 자리한 지형이 궁궐을 닮았다 해서 이들을 궁들이라 하고 그 제방 안에 있는 마을을 「 궁원안 」 이라 부른다. 「 궁원안 」 남쪽에 새로 부락이 형성된 「 팔봉 」 이라는 동네가 생기여 이 마을 주민은 서천 등지에서 이주된 주민으로 간척지로 이루어진 새 동네이다.

배다리

「 배다리 」 라는 다리가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세기 1923년경까지만 하여도 이곳에 배가 들어왔는데 개뚝을 막아 논을 만들어서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배다리가 있을 때부터 배다리가 있다 해서 그리 부른 마을이다. 李朝末(이조말)의 儒學者(유학자) 成均館博士(성균관 박사) 李弘求墓(이홍구 묘)가 있다.

울개

「 배다리 」 동쪽으로 천안동 도로변에 있는 부락인데 鳴溪(명계)리라고도 부르고 1979년에 開沸百舟梧出張所(개비백주오출장소) 所在地(소재지)가 되었으며 漢城左尹(한성좌윤) 從二品(종이품) 李秀夏公(이수하공)의 墓所(묘소)가 있다.

대텃골

「 배다리 」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대텃골 」 대동(臺洞)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반석에 앉은 것 같은 형국(形局)이라 하여 「 대텃골 」 대동(臺洞)이라고 부른다.

듬붓골

「 울게 」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듬붓굴 」 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숲이 우거진 마을이었다 한다.

물방아보

「 울개 」 북쪽으로 보가 있는데 여기를 「 물방아보 」 라고 부른다. 옛날 이 보에 물방아간이 있었다 해서 「 물방아보 」 라고 부른다. 「 수치보 」 라고도 부른다.

거어리

「 듬붓굴 」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거어리(巨於里) 「 게어리 」 라고 부른다. 옛날에 거인(巨人) 장자(長子)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거어리(巨於里) 「 게어리 」 라고 부른다.

寬倉里 (관창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 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목충면(木忠面)의 구역(區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사동(砂洞) 신리(新里) 관리(寬里) 후동(後洞) 하창리(下倉里) 죽림리(竹林里)와 내막리(內幕里) 신촌(新村)의 各一部(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리(寬里)와 하창(下倉)의 이름을 따서 관창리(寬倉里)라 하여 주포면(周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로 되었다. 이곳에서 之石墓(지석묘)의 유적지와 마제석검검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다.

下倉 (하창)

하관(下寬)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하창(下倉)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창고가 있었던 마을로 「 창터 」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하창(下倉)이라고 부른다.

창터

해창(海倉)마을에 있는 조선(朝鮮) 때 해창(海倉)의 터다. 이 부근(附近)의 조세(組稅)를 받아 저장하였다가 배로 바다를 거처 한양(漢陽)으로 운반하였다.

절골

상관(上寬)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 절골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어서 「 절골 」 이라 부르던 마을이다. 돌과 모래가 많아서 「 석골 」, 「 사동 」 이라고도 부른다. 「 절골 」 뒤산을 운수산(雲垂山)이라 하는데 망해암(望海庵)이 있었기에 「 절골 」 이라고 한다.

새터

상관(上寬) 동(東)쪽에 새로 된 마을로 「 새터 」 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 새터 」, 「 신리 」 라고 부른다.

뒷골

해창(海倉) 뒤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뒷골 」 이라고 부른다. 후동(後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뒤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 뒷골 」 후동(後洞)이라고 부른다.

대섶말

하관(下寬)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대섶말 」 이라고 부른다. 대숲이 우거진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 대섶말 」 죽림리(竹林里) 죽촌(竹村)이라고 부른다. 이 부락에 창미 국민학교가 서있고 그 학교 서편으로 창미라는 부락이 새로 형성되여 있다.

寬里 (관리)

관창리(寬倉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관리(寬里)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상관(上寬)이라 부르고 상관(上寬)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 「 아랫말 」 이라고 부른다. 아랫마을에 관창 국민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隱浦里 (은포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구역(區域)인데 앞에 개가 있으므로 「 은개 」 또는 은포(隱浦)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내평리(內坪里) 간평리(間坪里) 중평리(中坪里) 외평리(外坪里) 신촌(新村) 장항리(獐項里) 대동(臺洞) 일부를 병합하여 은포리(隱浦里)라 하였다.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교면 은포리로 되었다.

간평(間坪)

내평(內坪)과 중평(中坪) 사이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간평(間坪)이라고 부른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자리한 마을이라 간평(間坪)이라 부른다.

內坪 (내평)

「 궁뜰 」 의 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내평(內坪)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들 안쪽에 자리해 있다 해서 내평(內坪)이라고 부른다

노루목이

중평(中坪)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노루목이 」 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 노루목이 」 라고 부른다.

소쟁이

은포사장(隱浦砂場) 남쪽 아래로 있는데 여기를 「 소쟁이 」 라고 부른다. 옛날엔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 하여 「 소쟁이 」 라고 부른다. 현재는 40여 세대의 주민들이 입주하여 남양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모래찜터로 有名(유명)하던 곳이다.

外坪 (외평)

「 궁들 」 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외평(外坪)이라고 부른다. 들의 바깥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외평(外坪)이라고 부른다. 外坪(외평)동쪽 언덕에 한전주택 아파트가 1982년에 500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3층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할미바위

내평(內坪) 동(東)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 할미바위 」 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바다 가운데 있어서, 바위의 형국이 할미와 같다는 전설(傳說)이 있는 바위인데 지금은 개뚝을 막아서 들 가운데에 있다.

궁들

은포리(隱浦里)에 있는 큰 들을 「 궁들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던 들이라 「 궁들 」 이라고 부른다.

참샘

「 노루목이 」 북쪽으로 샘이 있는데 이 샘을 「 참샘 」 이라고 부른다. 물이 매우 차서 약수로 통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시던 물이다. 이 「 참샘 」 아래에 있는 들을 영천(靈泉)들이라 부른다.

松鶴里 (송학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송도리(松島里) 대동(大洞) 산고내(散古乃)를 병합하여 송학리(松鶴里)라 하였다. 옛날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학이 서식하였음으로 「 송학리 」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로 되었다.

산고래

대동(大洞)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산고래 」 라고 부른다. 마을 돌산에 사람의 뼈가 상했을 때 약채로 쓰는 산골이라는 약석이 있다 해서 「 산고래 」 산고내(散古乃)라고 부른다.

松島 (송도)

대동(大洞) 서(西)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송도(松島)라고 부른다. 섬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도(松島) 「 솔섬 」 이라고 부르는데 섬에는 42호(戶)가 살며 인구(人口 )가 289명이 사는 섬이다.

서낭댕이

「 첫굴 」 에서 「 은포리 」 로 넘어가는 고개를 「 서낭댕이 」 라고 부른다.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 해서 「 서낭댕이 」 라고 부르는 고개다. 또한 "옷"나무가 많다 해서 「 옷고개 」 라고도 부른다. 그 고개 밑에 1937년에 송학 국민학교가 위치하여 송학, 고정, 은포 3개리 아동들 공부하는 학교가 있다.

大洞 (대동)

「 산고래 」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대동(大洞)이라고 부른다. 송학리(松鶴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큰 마을이라 대동(大洞)이라고 부른다.

竹島 (죽도)

「 산고개 」 남서(南西)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죽도(竹島) 「 대섬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섬이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 해서 「 대섬 」 죽도(竹島)라고 부른다.

가그말고개

「 대동 」 에서 오천면 오포리「 가그말 」 로 넘어가는 고개를 「 가그말고개 」,「 가그말재 」라고 부른다. 「 가그말 」 로 넘어가는 고개라 「 가그말고개 」 라고 부른다.

송도당 (松島堂)

「 솔섬 」 위쪽으로 있는 섬을 「 위솔섬 」 이라 부르고 「 솔섬 」 아래에 있는 섬을 「 아래솔섬 」 이라고 부른다. 「 아래솔섬 」 엔 복판에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을 송도당(松島堂)이라고 부른다.

봉대산 (烽臺山)

대동(大洞) 동(東)쪽에 있는 228m 되는 산이 있는데 옛날에는 국가 보안을 위한 정보의 수단으로 이용하던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가 있떤 산이였음으로 봉대산(烽臺山)이라 하며 지금까지 그터가 남아 있다.

살막리마을

「 산고래 」 東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바다에 어부들이 살을 매고(어장) 살에 고기를 잡으러 오고 갈 적에 쉬어가는 막을 지였던 곳이어서 「 살막리 」 라 하였으며 지금은 70여 호의 주민이 입주하여 일명 현당반이라 한다.

高亭里 (고정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 때 한서리(漢嶼里) 마동(馬洞) 고만리(高만里) 사당리(詞堂里) 조금진(造今津)을 병합하여 고정리(高亭里)라 해서 주포면(周浦面)에 속했다. 고만리 동쪽에 187m 되는 국수봉이라는 산이 있는 그 산 남쪽에 土亭先生(토정선생)의 묘가 있어 고만리의 高(고)자와 토정의 亭(정)자를 따서 「 고정리 」 라 했다 한다.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로 되었다.

고만

「 사당굴 」 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고만 」 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 자리한 마을인데 골짜기가 열둘이나 되어서 굴을 따러 가는 아낙네들이 가도 가도 그만 그만하다 하여 「 가도 그만 」,「 안가도그만 」 이란 뜻에서 「 고만 」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고만이 」, 「 고만리 」 라고 부를 때도 있다.

馬洞 (마동)

「 사당굴 」 서(西)쪽으로 「 국수봉 」 이란 산이 있고 「 국수봉 」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마동(馬洞)이라고 부른다. 마동(馬洞) 동쪽에서「 사당굴 」 로 넘어가는 고개는 마동재(馬洞峠)라고 부른다. 지형(地形)이 말의 형국(形局)이라고 해서 「 마동 」 이라고 한다.

사당굴

「 고만이 」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 사당굴 」 이라고 부른다. 「 사당동 」 이라고도 부르는데 한산 이씨(漢山李氏)들의 사당(祠堂)이 있다하여 「 사당굴 」, 「 사당동 」 이라고 부르며 領議政(영의정) 省庵公(생암공) 領議政之茂吏曹參判之(영의정지무이조참판지) 吏曹參判鳴(이조참판명) 谷等漢山李氏墓(곡등 한산 이씨 묘)와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조금진

「 사당굴 」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조금진(造今津) 「 조금날 」 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해변가에서 조금 때 건너다니는 나루터였다 한다. 그래서 「 조금날 」 조금진(造今津)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간척지로서 그 형태가 없어졌다.

한여 (漢礪)

「 마동 」 西北(서북)쪽에 한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화력발전소의 基地(기지)로 인하여 폐동이 되고 「 속바리 」 라는 곳에 새마을을 조성하여 「 새한여 」 부락이 생겼다.

新垈里 (신대리)

백제(百濟) 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 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 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木忠面(목충면) 木洞(목동)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區域改編時基(행정구역 개편 시기) 新村(신촌)의 新字(신자)와 垈洞(대동)의 垈字(대자)를 따서 新垈里(신대리)로 改稱(개칭)되어 至今(지금)에 이르고 있는 바 周浦面(주포면)의 崔南端(최남단)에 位置(위치)되여있고 面內(면내) 最大(최대)의 面積(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오서산, 진당산의 莎脈(사맥)으로 운수봉을 뒤에 두고 넓고 얕은 山이 左右(좌우)로 뻗어 있고 中央部(중앙부)로 河川(하천)이 흐르는 데 이것이 卽(즉) 新垈川(신대천)이다. 新垈里(신대리)사람들의 젓(乳)줄기인 新垈川(신대천)을 中心(중심)에 두고 上下左右(상하좌우)로 自然部落(자연부락)이 散在(산재)되어 350餘尺(여척)에 2,000餘名(여명)의 人口(인구)가 農事(농사)를 主(주)로 依(의)존하여 거주하고 있다. 新垈里(신대리)의 最北端(최북단)의 운수봉에 이어 雄壯(웅장)한 모습의 武才峰(무재봉)이 있는데 그 아래에 將軍臺座(장군 대좌)의 名穴(명혈)이 있다 하여 武才峰(무재봉)이라고 한다. 나무 그 밑에 陽地(양지)바르고 해맑은 마을이 있는데 卽(즉) 木洞(목동)이다. 나무가 鬱蒼(울창)하고 물이 靑絶(청절)한 마을이라 하여 (나물)木洞(목동)이라 하였다 한다. (나물)에는 예부터 慶州李氏(나물이씨)의 原居地(원거지)로 近(근) 20대를 繼承(계승)하여 살고 있다. 나물의 東北方(동북방)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卽(즉) 砂器店(사기점)골이라 한다. 옛날에 莎器(사기)를 만들었던 곳이라 「 莎器店(사기점)골 」이라 부른다. 至今(지금)에도 莎器(사기)조각이 散在(산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골짜기 안에는 採石(채석)골이니 너른골, 가운데골, 말골, 靑羅面(청라면)에 속하는 진골로 넘어 다니는 질째, 병목골等(등)의 여러 골짜기가 있고 그곳이 卽(즉) 新垈川(신대천)의 原始點(원시점)이다. 마산(馬山) 나물의 東南(동남)쪽에 馬山(마산)재가 있는데 渴馬飮水形(갈마음수형)이라 하여 馬山(마산)이고 그 아래 部落(부락)이 마산골이다. 馬山(마산)골 앞에 수백째라는 山이 있는데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물바가지라는 說(설)도 있고 수박처럼 둥굴고 수박밭이 있었다 해서 수백째라는 말도있다. 「 馬山(마산)골에는 龍仁李氏(용인 이씨)의(마산李氏)의 原居地(원거지)로 10餘代(여대)가 至今(지금)에 이르도록 繼承(계승)하여 살고 있다. 」 「 오야골 」 나물의 西 쪽으로 조그만 마을이 「 오야골 」 인데 옛날에 기와를 만들던 (瓦冶谷(와야곡))이 오야골로 變(변)한 듯하다. 「 오야골 」 에는 10餘代(여대)가 繼承(계승)하여 살고 있는 喬桐印氏(교동인씨)(오야골 印氏(인씨))의 原居地(원거지)이다. 三洞里(삼동리)의 앞으로 東쪽 馬山(마산)재에서 西쪽 성황당재(일名 한술째(寒水峙(한수치)))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옛날에는 靑陽公州(청양공주) 개명 等(등)에서 鰲川水營(오천수영)골로 通來(통래)하는 大路(대로)였다 한다. 이길의 안쪽의 새마을을 通(통)칭하여 나물(木洞)이라고도 하는데 傳說(전설)에 依(의)하면 나물에는 他人歸洞穴(타인귀동혈)의 名堂(명당)이 있고 三災不入之地(삼재불입지지)(兵亂(병란), 疾病(질병), 雪災(설재))등의 세 가지 재앙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名堂(명당)마을이라 한다. 至今(지금)에도 가을에 서리(霜)를 보지 못하고 겨울을 나는 해가 허다하고 서리가 온다 해도 他地方(타지방)보다 15日내지 20日은 늦게 내린다. 나물의 뒤에는 佛堂(불당)골, 佛通(불통)골, 절골, 書堂(서당)골, 옛날에 碑石(비석)이 서있었다는 「 비선거리 」 亭問(정문)이 있었다는 「亭問(정문)거리」等(등)이 있고 三洞里(삼동리)의 中央(중앙)에(정거정번데기)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新垈里(신대리)의 樵軍(초군)들이 모여 쉬었다 갔다는 곳이어서 「 停車場(정차장)번데기 」 라고 하였다는데 지금에는 그 곳이 (버스)의 終點停車場(종점 정차장)이 되고 있다. `1971년 2월 1일 군조례 제212호로 주교출장소 설치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1134호로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교면 신대리로 되었다.

垈洞伐里 (대동벌리)

나물의 南(남)쪽 新垈里(신대리)의 中央部(중앙부)의 벌판에 마을이 垈洞(대동)과伐洞(벌동)이다. 垈洞(대동)과垈里(대리)는 함께 붙어있어서 通稱(통칭) 벌말(伐里)이라고 한다. (이곳 벌말에는 密陽朴氏(밀양박씨)들이 主(주)로 살고 있다.) 이 마을 앞에는 塔(탑)이 서있는 앞들이라 하여 「 塔(탑) 」, 「 탑앞들 」 이라는 名稱(명칭) 들판이 있다.

안터 (內基)

번말의 西쪽으로 울타리 안속같은 아늑한 마을 터라 하여 안터(內基)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主(주)로 老山金氏(노산 김씨)들이 居住(거주)하고 있는데 옛날에 先祖(선조)들은 垈洞(대동)에서 살았다 해서 垈洞金氏(대동 김씨)라고도 하는데 至今(지금)에는 안터金氏(김씨)라 한다.

어초리 (漁樵里)

나물의 南(남)쪽에 수백째에 이어 탕관봉이 있는데 山貌形(산모형)이 탕관 같다 하여 탕관봉이고 그 아래 마을이 어초리(漁樵里)다. 옛날에 정계에서 은퇴한 선비들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고 난 뒤 산에서 나무를 해서 먹고 살만한 한적한 곳이라 해서 漁樵里(어초리)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에는 淸州韓氏(청주 한씨)(어초리韓氏)들의 原居地(원거지)로써 어초리韓氏(한씨)들이 繼承(계승)하여 살고 있다.) 수백째와 탕관봉의 사이에 절터골이 있는데 옛날 선비들이 그곳절의 정경이 霽月(제월)(개인 하늘의 알)같고 절의 大 師(대사)가(霽月先風(제월선풍))(度量(도량)이 넓고 시원하다 하여). 제월곡인데 지금은 젤월곡이라고 한다.

용머리 (龍頭里)

어초리의 靑龍格(청용격)인 산부리가 나있는데 그 안에 마을을 용머리(龍頭里)라 하고 있다.

파제비

탕관봉에 이어 두 봉우리의 산이 있는데 卽(즉) 鳳凰山(봉황산)이다. 그 아래에 마을을 파(巴)제비라 하는데 옛날巴草(파초)와의 緣由(연유)가 있었다 해서 파제비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새뜸

파제비의 앞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군들째

新垈里(신대리)의 南端大川(남단대천)의 接境(접경)의 마을인데 옛날 그째백이를 通(통)하여 大川面(대천면) 軍入路(군입로)로 上陸(상륙)한 倭(왜)놈의 軍隊(군대)가 들어왔다 하여 「군둘째」마을이다. 파제비와 군둘째의 동쪽 鳳凰山(봉황산) 밑에 절이 있었다는 절터골이 있다.

「 亂民村 (난민촌) 」 「 新設洞 (신설동) 」

파리제의 남쪽 군둘째의 동쪽으로 난민촌(亂民村) 或(혹)은 新設洞(신설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六(육),二五(이오) 後(후) 以北(이북) 피난민들을 郡施策(군시책)으로 이곳에 定着(정착)시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 난민촌 」 또는 새로 생겼다 해서 「 新設洞(신설동) 」 이라 하는 마을이다.

장승배기

나물의 西南方(서남방) 안터 밑에 옛날에 장승이 박혀있었던 곳이라 하여 장승백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어초리와 장승백이 사이의 들판을 갱미들(江尾)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바다물(海水(해수))가 이곳까지 들어오고 新垈川(신대천)의 江(강)물이 끝나는 곳이어서 江尾(강미)라 하였다 한다.

점촌 (店村)

1950年代부터 1970年代까지 이곳에서 옹기를 만들었던 마을이어서 이 마을을 점촌(店村)이라 한다.

신촌 (新村), 창머리

新垈里(신대리)의 末端(말단)에 位置(위치)하고 海(해)변에 인접해 있었고 새로 생겼다 해서 새말(新村(신촌))이라 하였는데 옛날에는 蒼海(창해)(黃海(황해))의 마지막(머리 부분) 船律(선율)이어서 창머리라고도 하였고 寬倉里(관창리)의 海倉(해창)이 있는 靑龍(청룡)뿌리인 머리 부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倉(창)머리라고 불렀다는 設(설)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主(주)로 寬倉里(관창리), 한술서 살던 淸州韓氏(청주 한씨)(한술韓氏)들이 移住(이주)하여 原居地(원거지)로 定(정)하고 至今(지금)에 이르도록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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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5-3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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